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롤루스 왕조 (문단 편집) === 분할과 재통일 === [[https://blog.naver.com/iceman123456/222637825258|카롤링거 가문의 몰락에 대한 자세한 전개는 이 글 참조]] 루도비코 2세가 후계자없이 사망하면서 사촌인 루트비히 2세의 장남 카를로만에게 상속을 하였다. 그러나 샤를 2세(대머리 샤를)가 이탈리아로 진격해 황제로 즉위했다. 이를 계기로 서프랑크와 동프랑크 간의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형인 루트비히 2세(독일인 루트비히)가 죽자 샤를 2세(대머리 샤를)는 [[황제]]라는 명분으로 동프랑크 지역의 영지들을 노골적으로 탐냈다. 루트비히 2세(독일인 루트비히)의 둘째 아들인 '작은 루트비히'(홀로도비코스, 루트비히 3세)가 이를 저지하였고 그 와중에 샤를 2세(대머리 샤를)는 병사했다. 샤를 2세(대머리 샤를)의 아들 [[루이 2세]](말더듬이 루이)가 제위를 물려받으려 했으나 이탈리아로 가기를 망설였고, 카를로만은 상속을 명분으로 이탈리아를 차지했으나 교황이 황제 대관을 해주지 않았다. 교착상태에서 둘은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다. 카를로만은 동프랑크의 영지들과 이탈리아, 제위를 동생 [[카를 3세]](뚱보 카를)에게 상속시켰다. 아들인 아르눌프가 있었으나 사생아였기 때문에 물려주지 않았고 이에 계속 분쟁이 발생되자 카를 3세는 상속한 영지 중 아르눌프가 다스렸던 바이에른 지역을 넘겨준다. 카를 3세는 형 카를로만이 상속해준 제위와 바이에른을 제외한 동프랑크 지역의 영지들, 부르군트를 제외한 이탈리아와 중프랑크 지역의 영지들, 서프랑크의 샤를 3세(단순왕)[* 말더듬이 루이 2세의 아들이자 뚱보 카를 3세의 5촌 조카]가 어린 나이(5세)라는 이유로 서프랑크의 왕을 대리함으로써 제국을 다시 통합하였다. [[https://blog.naver.com/iceman123456/222640703967|#]]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1년 만에 다시 최종적으로 분열된다. [[https://blog.naver.com/iceman123456/222642631833|#]] 이후 귀도 왕조를 거쳐 아르눌프가 제위를 차지하기도 하지만 아르눌프를 끝으로 통일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조는 끝나게 된다. [[파일:Carolingian_empire_915_svg.png|width=300]] 915년 카롤루스 왕가의 지배지. [[파일:Europe_in_1100_(2756×2232).jpg]] 셋 이상으로 분열되었던 프랑크 왕국의 영토는 결과적으로 12세기에 [[프랑스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두 지역으로 대체로 정립되어 중세 전성기로 이어진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this=문단,title=프랑크 왕국,version=373,paragraph=)] [[분류:카롤루스 가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